“모든 애견인들의 염원(念願)을 담은 판타지” — 어느 평론가의 평이다. 잠깐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이 영화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나은 표현을 찾기는 어려웠다.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던져진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이 개는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는데, 곧장 다른 개로 환생한다. 이 과정을 겪어도 ‘정체성’은 또렷이 유지된다는 설정이다. 왜? 어떻게? 그냥 ‘설정’이다. (그래서 ‘판타지’라는 얘기다.)


한 번은 레트리버로 태어났다. 차 안에 갇혀 탈수로 죽을 뻔했다. 이를 우연히 발견한 “이든”이라는 소년 덕분에 살아난다. 그리고 길러진다. 그로부터 “베일리”라는 이름을 얻고, “이든”의 곁에서 그의 모든 성장 과정을 함께 한다.


개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에 비하면 짧다. “베일리”는 “이든”의 냄새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한다. 보통의 동물을 주제로 한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대표적인 예로 ⟨말리와 나⟩ (Marley & Me, 2008).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개가 환생(!)을 한다.


“베일리”는 셰퍼드로 다시 태어나 “엘리”라는 이름을 받는다. 외로움을 품은 경찰 “카를로스”와 함께 살며 그를 위로하고 그와 함께 범죄를 해결한다. 그다음에는 웰시 코기로 태어나 “티노”라는 이름을 받는다. 역시 외로운 대학생 “마야”의 곁에서 살면서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모습까지 지켜본다.


‘개’의 눈으로 보기에 ‘인간’의 삶은 가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인간이 쓴 대사이지만, 이 말은 특히 가슴에 남았다: “인간들은 복잡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예를 들면, 이별 같은 것.” (Humans are complicated. They do things dogs can't understand. Like leave.)


환생을 거듭하던 “베일리”는 결국 삶의 목적을 찾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Just be here now.)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별’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서 왜 떠나는가. 좋아한다면서 왜 같이 있지 않는가.


영화에서는 장성한 “이든”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가족과 “베일리”를 잠시 떠나게 된다. “베일리”는 엄청나게 먼 거리를 가로 질러 “이든”이 타고 있는 차를 따라 잡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이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명절 연휴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인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 있으면 궁금하고, 보고 싶은 가족들을 뒤로 하고 나는 왜 서울로 가고 있는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서울에 ‘나’의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별’을 통해 홀로 서는 덕이 ‘성장’의 한 방법이고, ‘성숙’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 그러면 된 것이다.


반려견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며 교감하는 장면들이 많다. 개를 데리고 학교도 가고 수업도 듣고 운동 경기도 보고 동네 축제도 가고 한다. 개와 살아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나에게는 꽤 신선한 간접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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