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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무라카미 하루키, 2012)

북-로그

by 박세 parxehee 2018.10.08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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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하루키는 자신이 쓰는 ‘에세이’는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소설을 쓰고 남은 자투리 생각, 소재를 모아 에세이를 쓴다고. 그러나 이왕 쓰는 만큼 최고의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호오, 좋은 자세로군요, 하루키군.)

책 제목은 맨 처음 실린 글과 중간 어디쯤 실린 글의 제목을 합친 것인데, 그러니까 전혀 관계 없는 두 에세이의 제목을 붙여서 이 에세이집 책 제목을 만든 것이다. 너무 대충이잖아, 싶어서 원제를 찾아보니 «커다란 순무, 어려운 아보카도»이다. 역시 에세이 2개의 제목을 이어서 붙였다. 딱히 선정 이유가 있는 것일까. 편집자들이 모여 앉아서 가장 좋았던 에세이를 꼽아봤더니 이렇게 1위, 2위를 했다던가.

그렇게 놓고 보니, 일본어로 된 원제는 순무와 아보카도 둘 다 채소인데, 한국어 번역판은 채소와 바다표범이 등장해서 어쩐지 좀 더 풍부하고 황당한 느낌이 든달까. 순무-아보카도 조합보다는 채소-바다표범의 조합이 좀 더 낯설지 않은가.

각 에세이 말미에 한 두 문장의 유머나 수수께끼나 생뚱맞은 딴 얘기를 써놓았다. 가령 <채소의 기분>에는 “야마노테센의 노선도는 피망 모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같은. 이걸 어디서 봤더라 했는데 최근 읽은 ⟪날마다, 브랜드⟫에서도 이런 구성이 있었다. 저자가 하루키 에세이의 팬이라고 밝혔는데, 관련이 있는 것 같달까.

역시 주말 휴일에는 말랑한 에세이가 좋다.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파티란 다 합해서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직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누구도 명함 교환 따위는 하지 않고, 일 얘기도 하지 않고, 방 저쪽에서는 현악 4중주단이 모차르트를 단정하게 연주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샴고양이가 소파에서 기분 좋게 자고 있고, 맛있는 피노누아르를 따고, 밤바다가 보이는 발코니 위로 호박색 반달이 떠오르고, 산들바람은 향기롭고, 실크시폰 드레스를 입은 지적이고 아름다운 중년 여성이 내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타조 사육법을 가르쳐주는 — 그런 파티다. (p.27)

내게도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 방침 같은 것은 일단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 … 옛날 미국 서부의 술집 피아노에는 ‘피아니스트를 쏘지 말아주세요. 그도 열심히 연주하고 있습니다’ 하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 피스톨, 갖고 있지 않으시죠. (p.34)

이 년쯤 전의 일인데, 보스턴의 펜웨이 구장에서 레드삭스 대 양키스의 시합을 보았다. 3루 측 뒷자리여서 3루수의 수비를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양키스의 3루수는 물론 알렉스 로드리게스. 시합이 시작되고부터 끝날 때까지 투수도 타자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의 수비만 관찰했다. 어째서냐고? 그 움직임이 아름다울 만치 훌륭해서. 공 하나하나마다 미묘하게 수비 위치를 이동하여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 시합에 백오십 번의 피칭이 있었다면 정확히 백오십 번의 까치발을 했고, 마치 표범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났다. 그 리듬이 훌륭했다. 어느 공 하나 힘을 빼지 않았다. (p.98~99)

게다가 여자아이들이 책에 사인을 받은 뒤 “무라카미 씨, 키스해주세요”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거짓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뺨에 키스를 했다. 계속 그렇게 하니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출판사 사람은 “시간 없으니 키스까지는 하지 마세요”라고 했지만, 그런 기회는 흔치 않았으므로 “아뇨, 작가로서 마지막까지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원하는 대로 키스해주었다. (p.110)

수세식 화장실에 ‘대소’ 레버가 있는데, 그걸 ‘강약’으로 하면 안 되는 걸까? (p.111)

수집(마음을 쏟는 대상)할 때의 문제는 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그걸 이해하고 사랑하는가, 그런 기억이 당신 안에 얼마나 선명히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진짜 의미일 것이다. (p.123)

고교 시절에 나는 소설가가 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언젠가 제대로 된 글을 쓰게 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책을 읽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아니, 책 담았던 상자의 냄새만으로도 행복했다. 지금은 당연한 얼굴로 뭔가 거들먹거리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p.139)

그러나 납작하게 짜부라진 맥주 캔은 뭔가 안쓰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어젯밤 비운 알루미늄캔을 아침에 볼 때면 까닭 없이 허무해진다. ‘아아, 또 이렇게 마셔버렸네’ 싶은. 반면 빈병은 언제나 꼿꼿하고 단정하게 바로 서 있다. (p.143)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 동안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 (p.175)

음악은 그때 어쩌다보니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걸 무심히 집어들어 보이지 않는 옷으로 몸에 걸쳤다. /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p.219)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6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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