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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블로거라니/무비로그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영화 ⟨그린 북⟩ (Green Book, 2018)

개봉관에서 영화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스크린 아래에 횡 스크롤 바가 없어서 기분이 묘했다. 토요일 오전 영화관은 한산했고, 영화에 집중하기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여건이었다.

호평이 많았기에 보기 전부터 기대를 했고, 역시 만족스러웠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게 다 들어 있는 영화였다. 피아노, 여행, 우정, 화해, 가족애, 편지 그리고 아라곤(아라고른 2세).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이른바 ‘소수자 영화’로 분류되는 모양인데, 이 영화는 작품성은 물론이고 대중성도 놓치지 않았다. ‘덤 앤 더머’ 시리즈를 만들었던 피터 패럴리 감독이 ‘버디 무비란 이런 것이다’하고 제대로 보여준다.

‘그린 북’(Green Book)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미국에서 흑인들이 여행을 할 때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식당 등을 정리해놓은 일종의 여행 가이드북이라고 한다. 1962년, 뉴욕 뒷골목 출신으로 나이트클럽 기도 ‘떠버리 토니’(비고 모텐슨)이 흑인 클래식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남부 투어의 운전사(겸 로드매니저)로 고용되면서 그와 함께 남부 지방을 여행하게 된다.

지금도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1960년대 초반의 미국의 인종차별은 정말로 심했다. 어떤 주에서는 인종차별이 법으로 정당화 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도 노골적인 차별 장면이 등장한다. 어떤 거리에는 밤 늦게 흑인이 나다닐 수 없다는 ‘흑인통금법’이 있다거나 기껏 피아노 연주를 하라고 초청해놓고 화장실 만큼은 따로 쓰도록 한다거나.

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치미는 장면들이 많고, 그 감정을 대변하듯 뉴욕 뒷골목 출신 우리의 ‘떠버리 토니’는 즉각적으로 대응한다. 본인 스스로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었지만, ‘돈 셜리’가 당하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 욕도 하고 화도 내고 심지어 경찰을 줘패기도 하고 한다. 

반면, 고상한 ‘돈 셜리’는 이 상황과 맥락 — 남부 백인들이 클래식 피아노 같은 고급 문화를 즐긴다는 생색은 내고 싶으면서, 여전히 자신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하등 인종으로 차별하는 이중성 — 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끝까지 ‘존엄함’을 지키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런 태도,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토니’에게 ‘돈 셜리’는 이렇게 답한다:

폭력을 사용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소.
당신이 존엄함을 지킬 수 있을 때만이 이길 수 있을 것이오.
명심하시오. 존엄함이 언제나 이긴다오. 

(You never win with violence.
You only win when you maintain your dignity.
Dignity Always Prevails.)

같은 시기,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비폭력 저항의 메시지가 영화에도 녹아있는 듯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돈 셜리’는 북부에서는 환영을 받으며, 신변 위협 없이 편하게 투어를 다닐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위험한 남부 투어를 본인이 자처한 것이었다. 변화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를 낸 것이다.

그렇게 용기 있고 의식 있는 고귀한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고뇌와 희생. 이렇게만 끝났다면 영화가 얼마나 지루하고 촌스러웠겠는가. ‘돈 셜리’가 처한 상황은 한층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다. 궁극적으로는 대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근접한다. ‘토니’가 당대 유명한 ‘흑인 대중 가수’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항상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려는 ‘돈 셜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흑인은 당신이지만, 오히려 내가 더 흑인다운 것 같소다.”

이 말은 ‘돈 셜리’를 자극한다. 사실 ‘돈 셜리’는 흑인이지만 노예가 아니고, 흑인이지만 부유하며, 흑인이지만 박사 학위가 있다. 흑인이지만 재즈가 아닌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하고, 흑인이지만 말이 많지 않고 흑인이지만 상류층의 언어를 쓴다. 흑인이란 무릇 이렇다(또는 이럴 것이다)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 흑인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의 모습과 내가 바라는 모습이 다르듯, 내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과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역시 다르다. 이 둘이 일치하는 경우는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 말그대로 ‘고정관념’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끊임없이 정체성 투쟁을 한다. 내가 가진 모습과 나를 바라는 모습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하고, 내가 가진 정체성을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자 한다.

그 고독한 투쟁이 연주를 마치고 백인들로 가득찬 청중을 향해 꾸며진 웃음을 어색하게 지어보이는 ‘돈 셜리’의 얼굴에서 표현된다. 매일 밤, 홀로 위스키 한 병을 비우며 어떤 커뮤니티에서도 진정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상심의 얼굴에서 표현된다. 그가 후일 친구가 된 ‘토니’와 함께 지내면서, 그와 함께 흑인들만 갈 수 있다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보이는 환한 웃음과 대조된다. 

‘떠버리 토니’는  돈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지만, ‘돈 셜리’와 함께 한 여정 속에서 그를 진심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자칫 계몽적인 접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는 일이 있기도 한다. ‘토니’와 ‘돈 셜리’의 관계가 보여주듯 상대방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와 같은 경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196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가 곳곳에 보였다. JFK가 언급되고, 뉴욕에 있는 영화관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를 상영하고 있다는 광고판도 보인다. 반면, 켄터키주에 도착해서 여기 왔으면 이걸 꼭 먹어야지 하면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장면은 고증 오류라고 한다. 실제로 KFC는 1972년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