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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 —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북-로그

by 박세 parxehee 2019.06.2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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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 2002)을 읽고

인간의 삶은 흔히 ‘여행’에 빗대어진다. 적절하고 인상적인 비유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란 여정에 나선 ‘여행자’인 것이다. 다만 이 여행에는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다. 우리는 이 여행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다. 때론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기도 하다. 하나 분명한 건, 우리는 지금도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

M. 스캇 펙.

M.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 2002)은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이며, 자신이 직접 정신질환 환자들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거쳐야 할 ‘훈련’에 대해, 이 훈련의 동력인 ‘사랑’에 대해, 세계관으로서의 ‘종교’에 대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초월적 존재의 ‘은총’에 대해 쓰고 있다. 얼핏 따분한 내용 같지만, 풍부한 임상 사례 덕분에 읽는 맛이 상당히 다채롭다.

프로이트Freud는 정상적인 인간을 “약간의 히스테리, 약간의 편집증, 약간의 강박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했다. 인간은 모두 약간의 정신질환을 안고 살며, 이를 인정함으로써 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다. 근대의 인간은 자신이 정상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과 보편적 기준, 표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강박을 안고 산다. 이 강박이 지나친 사람들은 잘 맞지도 않는 옷에 자신의 ‘무의식’을 억지로 구겨 넣는 셈이다. 이처럼, 프로이트 이전에 인간의 무의식은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었다.

무의식은 인간 의식의 심연에 있는 블랙박스와 같다. 정신치료는 이 블랙박스에 조심스레 다가가는 과정이다. 블랙박스를 열어 비행기 사고의 전말을 조사하듯, 치료자는 환자의 말, 기억, 꿈 등을 매개로 환자의 무의식에 접근해 환자를 치료하고자 한다. 이제 무의식은 맞서 싸우고 억눌러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달래고 화해해야 할 대상이다. 융Jung에 의하면, 이 무의식과 의식의 부조화에서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일어난다고 했다(364쪽).

‘우울’은 “친근했던 무언가를 잃는 것과 관련된 느낌”(101쪽)이라고 한다. ‘상실’은 일반적인 경험이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우울증을 앓는다.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이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가 단지 우울증 증세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한다면 우울증은 오래 계속되며 환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 환자는 상실 이전의 과거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은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바로 이 부조화가 정신질환을 낳는다.

사랑했던 무언가를 포기하고, 상실을 인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마냥 미루기만 한다면, 그의 정신적 성장도 그곳에서 멈춰버린다. ‘회피’는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건전하고 지각 있는 길에서 벗어사는 길이며, 멀리 돌아가는 길이다. 어떤 경우든 문제는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수반하는 고통을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융은 “신경증이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21쪽)라고 썼다.

저자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할 ‘훈련’을 제시한다. 훈련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112쪽)다. 훈련의 첫 번째 기술은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이다.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다는 원리다. 이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두 번째 기술인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도 첫 번째와 같은 맥락이다. 책임을 지는 게 어려운 이유는 행동의 결과로 받는 고통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책임회피의 정도가 심한 환자는 무기력함에 시달린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악수를 둔다. 인간의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이를 받아들여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세 번째 기술은 ‘진실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이 역시 진실과 대면하는 고통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뜻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는 시시각각 변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걸으며 우리가 가진 ‘지도’를 계속해서 고쳐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하며, 자신의 지도를 타인의 비판에 노출시키기도 해야 한다. 이 과정은 불편하고 괴롭다. 그럼에도 현재의 편안함보다 ‘오늘의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

네 번째 기술은 ‘균형을 잡는 것’이다. 저자는 “균형을 잘 잡는 훈련은 곧 포기를 배우는 것”(96쪽)이라고 설명한다.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 역시 괴로운 일이다. ‘오래된 지도’와 ‘낡은 자아’는 비록 변화하는 ‘진실’과 맞지 않더라도 아늑함을 준다. 어떤 환자들은 이 아늑함에 사로잡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기보다, 자신의 인생 여정 전체를 중단하는 끔찍한 결정을 내린다.

각 훈련은 내용상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핵심은 당장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고, 항상 ‘진실’에 충실하고, 때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 의미의 사랑과 차이가 있다. 저자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118쪽)로 정의한다.

저자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면서, 한 편으론 상당히 엄격하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과 구별되어야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강렬한 경험임에 틀림없지만, 성적인 것에 국한된 경우가 많으며 대개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참사랑’은 오히려 ‘사랑에 빠질 때’가 아니라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128쪽).

더 나아가 숱한 매체나 저작물에서 나타나는 ‘낭만적 사랑’ 역시 저자가 정의하는 사랑, 즉 ‘참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하늘이 점지한 운명적 인연이라는 신화는 도리어 관계의 건강함을 망친다. “너 없이는 못 산다”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상대방과 함께 살 것을 선택하는 것”(143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만 할 수 있다. 생명 없는 대상이나 어떤 일에 대한 정신 집중은 애착으로 봐야한다. 우리는 애완동물이 독자적인 정신이나 의지를 발전시키길 소망하진 않는다. 우리에게 의존함으로써,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길 바란다. 반면, 순수한 사랑의 특성은 참으로 타인이 자신과 다르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처럼, ‘사랑’은 애착을 초월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부모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부모는 자녀의 신체 건강에 유전적, 문화적으로 영향을 주지만, 자녀의 정신 건강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아이는 부모가 더는 자신의 생떼거지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부터, 개별적 존재로서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부모가 자녀에게 보이는 행위에 따라, 자녀가 자존감을 지닌 책임 있는 개인이 되기도 하고, 의존적이며 고통을 회피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되기도 한다.

부모의 역할, 가족 문화의 영향은 개인의 세계관이나 종교관 같은 가치관 형성에도 결정적이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어떤 신을 믿고 어떤 종교에 귀의하든, 우리 내면에는 각기 독자적인 ‘지도’가 존재하는데, 부모는 이 지도를 그리는데 있어 가장 비중 있는 참조점이다. 종교나 종파에 무관하게 어떤 이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신을 믿으며, 또 어떤 이들은 혹독하고 처벌하는 신을 믿는다. 또한 잘 돌보아 주지 않는 부모를 만난 이는, 세상도 우리를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학대받으며 사회의 돌봄도 누리지 못한 채 자라는 사람도 있다. 성장의 각 단계에서 누구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상태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이는 부모의 사랑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가벼운 노이로제가 있는 환자가 그 증세가 더 악화되지 않고 그 상태로 유지되거나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왜 정신질환에 빠지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어떻게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을 이겨내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351쪽) 이건 인류가 가진 이성의 정점인 과학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문제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은총’이며, “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383쪽)이라 정의한다.

데카르트적 ‘회의’와 ‘비판능력’은 근대 과학의 발전에 초석이 됐지만, 대다수 현대인들을 바로 이 은총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도 낳았다. 배운 것을 회의하는 과학적인 태도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서라도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종 과학적 주장 자체가 우상이 되기도 하므로 이에 대해서 회의하는 태도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330쪽).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삶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다. 정녕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한가, 이는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관점은 아닌가, 인간의 삶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되묻게 된다. 이런 물음에 답하듯, 세간의 베스트셀러들은 하나같이 “긍정의 힘”을 설파한다. ‘긍정적인 마음가짐’만 가지면 삶이 잉태하는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떠들어댄다. 긍정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그러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시간이 해결하는 문제들은 애초에 문젯거리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그냥 잊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문제는 우리의 무의식에 상흔을 남긴다. “나는 괜찮다!”는 주문으로 문제를 덮는 건, ‘회피’의 또 다른 양식에 불과하다. 부실채권은 언젠가 반드시 회수된다. ‘삶은 고통’이라는 진리를 의연히 받아들이자. 그러면 “나는 괜찮지 않다. 너도 괜찮지 않다. 그러나, 다 괜찮다.”(I'm not OK. You're not OK. But, That's OK.)는 말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110쪽)이라고 한다. 인간은 ‘훈련’을 통해 정신적 성숙, 영적 진보를 달성할 수 있다. 인간에게 이러한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고통의 바다를 헤엄칠 때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일 필요가 있다. 문제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면, 애써 돌아갈 것 없다. 정면으로 부딪혀라. 두려워할 것도 없다. “두려움은 게으름의 주된 형태”(401쪽)이다. “게으름이야말로 영혼의 성숙에 장애가 되는 궁극의 장애물”(398쪽)이다. 작은 용기로 한 걸음 더 내딛어보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의 내면으로도 향해있다. <끝 / 201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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