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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2017)

북-로그

by 박세 parxehee 2018.10.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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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누구에게도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는 것,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지내니?’ 하는 일상적인 인사도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어서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 말이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는 문화 말이다. 완전히 고립된 공간에서 식량을 비롯한 자원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길고도 어두운 겨울을 지나면서, 불필요하게 서로를 죽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던 옛 바이킹 생존 전략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p.23~24)

우리 정원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곳에서 맡은 향기나 본 모습이 아니라 거기서 들은 소리였다. 환청이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는 정말로 식물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p.27)

엄마와 나는 아마 각자의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아마 한 번도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와 딸로 산다는 것은 뭔지 모를 원인으로 늘 실패로 끝나고 마는 실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p.31)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하는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p.33)

재앙을 거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누군가가 이미 그 길을 걸어 다시 그 경험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몸과 마음을 쏟아부으며 과학을 하는지 말할 수 있는 저널은 아직 어디에도 없다. (p.37)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p.49)

씨앗 안의 배아는 자라기 시작하면 일단 허리를 굽히고 기다리던 자세를 곧게 펴서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행태를 정식으로 띠기 시작한다. … 실험실에서는 이 딱딱한 껍질을 긁어내고 물을 조금만 부어도 거의 대부분의 씨앗이 자라난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껍질을 깬 씨앗만 수천 개가 넘지만 그다음 날 거기서 나온 초록을 보면 언제나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토록 어려운 일이 약간의 도움으로 그토록 쉬워진 것이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몸을 펼치고 원래 되려고 의도했던 그 존재가 마침내 될 수 있는 것이다. (p.51)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들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p.52)

정신과 병동의 고통은 너무도 진해서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여름날의 습기 찬 공기에서 숨 쉴 때처럼 그 고통을 들이마시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어려운 일은 환자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점점 커져가는 나의 무관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77)

그래서 나는 병원 일을 그만두고,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일도 포기했다. 그 대신 나는 내 삶을 구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 (p.79)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한곳에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을 포기해야 한다. … 그 작은 뿌리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장소에 몇 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를 점칠 기회를 딱 한 번 가진다. 뿌리는 그 순간의 빛과 습도를 감지하고 자기 속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정보를 점검한 다음 글자 그대로 몸을 던져 뛰어든다. (p.81)

종피(씨의 껍질)에서 첫 배축(식물의 배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부분) 세포가 자라나는 순간 모든 것을 건 도박이 시작된다.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가 먼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엽록소에서 양분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며칠, 때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씨 안에 들어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고, 거기서 실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 (p.81)

그러나 도박이 성공하면 수확도 엄청나게 크다. 뿌리가 필요한 것을 찾게 되면 부피가 커져서 주근이라고 부르는 곧은 뿌리로 자란다. 커지면서 기반암을 쪼개는 힘까지도 발휘하는 주근은 식물 전체의 닻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내내 하루에 몇 갤런의 물을 빨아들인다. … 땅 위의 모든 것, 정말이지 모든 것을 제거해도 멀쩡한 뿌리 하나만 있으면 대부분의 식물들은 비웃듯 다시 자라난다. 그리고 그런 회생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된다. (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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