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니 이 소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를 알겠다: 짧다. 간결하다. 읽기 쉽다. 그러니 많이들 읽고, 또 많이들 언급한다.

내 얘기 같고, 내가 아는 사람 얘기 같다. 그만큼 소재가 평범하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미 읽은 적이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아, 이렇게도 소설이 되는구나.’ 게다가, 올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니.

그 소름 끼치는 평범함이 바로 이 소설이 가진 힘이라면 힘일 것이다. 내 주위 독자들이 공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거 내 얘기, 내가 아는 사람 얘기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여기 있다.’

이 책을 아내와 함께 읽고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혼자 읽었을 때의 감상은 ‘답답해서 미치겠다’ 였는데, 아내와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그 김지영이 답답할 정도로 침묵하게 된 배경에 좀 더 포커스를 하게 되었다.

‘82년생 김지영’씨는 “더 많은 보상과 기회와 발언권이 주어져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면서, 그 보상과 기회와 발언권은 누가 주는 것인지가 궁금했던 나는,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이 책이 그저 답답한 옛 이야기 정도로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매년 어마어마한 수의 신간이 나오는 시대에 2015년 출간된 책이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는 점은 실로 놀랍다. 다이칸야마 츠타야서점과 하코다테 츠타야서점 그리고 다케오시립도서관에 대한 열렬한 반응 덕분일 터. 대단한 내용 있겠나 싶어 외면했다가 작고 가벼운 판형에 이끌려 결국 집어들었다.

저자 마스다 무네아키(增田 宗昭)는 츠타야서점을 만들고 다케오시립도서관(武雄市図書館)을 기획한 장본인. 그는 ‘고객 가치’의 관점에서 이 시대를 이른바 “서드 스테이지3rd stage”로 정의한다. 상품과 플랫폼이 범람하는 시대에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객에게 가치 있는 ‘라이프 스타일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라이프 스타일 제안’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이며 고도의 지적 작업이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가시화 할 수 있는 디자인 능력의 유무, 이러한 지적 작업을 가능케 할 ‘지적자본’의 축적 여부 — 결국 그런 능력을 가진 인재를 확보하고 길러낼 수 있는 조직인지 여부 — 에 기업의 사활이 걸려있다는 것은 이런 연유이다.

“디자이너 집단이 되어야 하는 미래의 기업에는 ‘직렬형 조직’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 낭비가 지나치게 클 뿐 아니라, 디자인 감각은 상하 관계를 통해 단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직렬형 조직보다 클라우드적 발상에 근거한 ‘병렬형 조직’ 쪽이 앞으로는 보다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반세기 전, 일본의 미래를 창조해 낸 것은 철근과 콘크리트였다. 하지만 앞으로 일본을 창조해 낼 것은 디자인이고 여기에 필요한 것은 지성이다.” (56~57쪽)

마스다 무네아키의 CCC는 일본인 5,000만 명이 가입했다고 하는 “T포인트”라는 포인트 적립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고, 그가 말하는 ‘라이프 스타일 제안’이 허무맹랑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 실체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의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데이터 덕분이다. 참으로 명민한 기업가이다.

한국어 번역본의 부제는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인데, 일본어본은 “모든 기업이 디자이너 집단이 되는 미래”이다.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고, 실제로 책을 읽고 나면 일본어본의 표현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출판 편집, 번역에 관하여 깊이 아는 바는 없으나 번역 출판물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역자 또는 출판사에서 굳이 이런 수정을 감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수작’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더도 덜도 말고 딱 10부작. 이 안에 흥미롭고 신비로우며 따뜻한 이야기를 차분히 쌓아올렸다. 빼어난 작화는 한 편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 속 편지는 탐색의 대상이요, 우정과 사랑의 매개체다. ‘연’이 남긴 편지가 ‘수리’를 ‘동순’에게 이끌고, 이 둘은 함께 ‘연’의 편지를 찾으며 우정을 쌓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친구 ‘연’에게 닿고자 그가 남긴 다른 편지를 찾는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 속 나의 마음을 울렸던 편지는 또 다른 누군가가 ‘수리’에게 보낸 것이었다. 너는 잊은 줄 알았건만…, 잊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전한 그 편지였다. 그 덕에 ‘수리’는 스스로 만든 생각의 성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편지의 힘이다. 마음이, 마음을 담은 메시지가 실물로 남는다. 마음은 변하고, 말은 사라져도, 편지는 남는다. 그때의 마음은, 그때의 말은, 진짜다. 편지를 받으면 진짜의 기운이 전해진다. 그게 힘이 된다.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시차를 발생시킨다. 발신자는 차마 직접 전하지 못한, 그럼에도 꼭 하여야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을 때, 수신자의 반응을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수신자에게 자신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수신자의 응답을 기다리며, 편지를 쓴다.

나는 요즘 틈만 나면 예쁜 엽서를 산다. 그리고 거기에 주로 어머니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전화를 편하게 받으실 수 없는 어머니에게, 매일 만나기 때문에 전화를 하면 용건만 간단히 하게 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어머니에게 반가움의 기억을 일깨워드리려, 아내에게 바쁜 일상에 휴식을 주고자, 편지를 쓴다.

전화를 할까, 문자를 보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펜을 들고 마는, 그 어렵고 복잡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마음이 뒤숭숭한 어느 날, 마음을 터놓을 친구 하나가 소중한 누군가가, 너와 나밖에 모르던 아지트 같은 공간을 회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보면 참 좋을 작품이다.

스타트업에서 브랜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젊은 마케터 네 사람의 일, 영감 그리고 취향에 관한 이야기. 왠지 비슷할 것 같은 네 사람의 공통점 만큼이나 차이점이 많아서 신기하다.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궁금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획물. 다만,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허무한 결론. 

빛나는 커리어를 쌓아올린 이들의 회고적 무용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그래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사람들의 고민과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글이라서 좋았다.

마케터가 되고 싶은 분들에게 블로그 운영을 추천합니다

블로그가 마케팅을 공부하기에 정말 좋은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우선 블로그 서비스를 통해 플랫폼과 채널에 대해 공부하게 돼요. 또 콘텐츠 기획, 검색엔진에 대한 최적화, 방문자 분석, 재방문 유도, 통계 보는 법, 방문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등에 관해서도 고민하게 되죠. 여기에 블로그를 성실하게 관리하며 끈기까지 기를 수 있어요. 마케터가 되고 싶은 분들에게서 “마케팅을 위해 지금 당장 뭘 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면 저는 항상 “블로그를 운영해보세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승희, 이 책, 45~46쪽)

마케터의 세 가지 미덕은 관찰, 피드백 흡수, 인간에 대한 이해 입니다

센스는 관찰입니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관찰력이 키워집니다. 마케터라면 브랜드를 의도적으로 사랑하고, 브랜드의 대상도 애정을 갖고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양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방법은 하나예요. 물어보고 또 물어봤습니다. 일을 할 때마다 결과물이 어떤지 주변 사람들에게 무수히 물어봤어요. 잘하는 사람들은 이미 어떤 경지에 도달했고, 누구보다 자기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잘하는 사람들 옆에 계속 있으세요. 그렇게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양이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것이 곧 피드백입니다. 계속 흡수하다 보면 보는 눈이 점차 생긴다고 믿습니다.

세상 만물과 사람에 대해 관심을 쏟는 일은 마케터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 같습니다. (이승희, 이 책, 48~50쪽)

마케터에게도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다니는 디자이너는 많아도 포트폴리오를 갖고 다니는 마케터는 드물었거든요. 포트폴리오를 가방에서 꺼낼 때, 저는 일종의 치트키를 쓰는 기분이 들어요. 여러분도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한번 만들어보세요. 자기 일을 스스로 되돌아보며 정리해볼 수 있고, 깔끔하게 하나의 파일로 완성된 포트폴리오는 그 자체만으로 성취감을 높여줍니다. (정혜윤, 이 책, 66~68쪽)

캠페인 진행 시 마케터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사항

첫째, 다른 사람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프로젝트 리포트를 작성할 것. 둘째,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전체 일정을 공유하고 진행할 것. 셋째, 모든 작업물은 구글 드라이브에 공유할 것. 계획을 세울 때는 항상 ‘사전 작업 - 이벤트 당일 - 후속 작업’ 순서로 시간표를 짜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펼쳐서 생각합니다. (이승희, 이 책, 241쪽)

마케터가 할 수 있는 일의 종류

  • 온라인 : 웹사이트, 온라인 광고 블로그, 뉴스레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 오프라인 : 이벤트, 전시, 공연, 강연, 콘퍼런스, 굿즈, 브로슈어 등 인쇄물 제작
  • PR : 보도자료 배포, 기획기사, 인터뷰
  • 함께 : 내부 - 브랜드 내재화, 사내문화 / 외부 - 프로젝트, 콘텐츠 협업
(정혜윤, 이 책, 256쪽)

마케터가 일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

우리는 누구고 이 일을 왜 하지? 내 이야기를 듣고 행동할 사람은 누구지? 무엇을 만들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모아놓고 봤을 때 갖고 싶게 만드는 겁니다.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합쳐졌을 때 더 매력 있어 보이도록. (정혜윤, 이 책, 256~257쪽)

브랜드 마케팅 캠페인 구성 차트

  • 영감 전달하기 (Inspire) : 여행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 연결하기 (Connect) : 각자의 취향과 연결된 구체적인 메시지 전달하기
  • 참여시키기 (Empower) : 자신에게 맞는 여행 경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에어비앤비 사용자 참여시키기

(손하빈, 이 책, 281쪽)


딕 모리스(Dick Morris)가 쓴 《파워게임의 법칙》(POWER PLAYS: Win or Lose--How History's Great Political Leaders Play the Game)에 따르면, 파워게임의 승자에게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1. 용기
  2. 겸손함
  3. 도덕적 규율에 대한 두려움
  4. 낙관적이고 유쾌한 사고
  5. 올바른 원칙

첫째, 용기. 

과감성은 승리의 요건 중에서도 필수 요건이다. 적대적인 상대와의 싸움은 역사나 인생에서 불가피한 요소이다. 용기는 무기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용기의 반대인 두려움은 꼼수를 부르게 된다. 두려움은 비도덕적인 방법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리더라면 때론 잔혹한 방법, 비도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때가 있다. 하지만 용기를 가진 리더는 잠깐 그런 방법을 쓴 다음에는 과감히 버린다.

둘째, 겸손함.

이것은 겸손한 척할 줄 아는 것 이상을 뜻한다. 도도한 역사에 비한다면 자신은 한낱 잔물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냉정한 시선을 갖고 있는 것이다. 파워게임에 임하는 리더에게 겸손함이란 생존의 무기와도 같다. 겸손함은 성공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인 오만함을 견제하여 객관적인 상황 판단을 가능케 한다. 또한 반대파나 이견 집단에 대한 포용력을 높여준다.

셋째, 도덕적 규율에 대한 두려움.

파워게임의 장에서 도덕이란, 유일무이한 절대 규칙(The Rule)이 아니라 하나의 규칙(a rule)일 뿐이다. 하지만 도덕률은 중요하다. 대개 훌륭한 원칙을 갖고 있는 리더들은 ‘정치력’을 발휘하지 비도덕적인 꼼수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원칙과 그에 대한 신념, 헌신에서 우러나오는 힘(또는 카리스마)을 통해 상대를 압도하고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다.

넷째, 낙관적이고 유쾌한 사고.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위기의 순간이다. 대중은 그럴 때마다 낙관주의와 유쾌함에 깊은 매력을 느낀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낄 수 있게 되어서이다. 정신적인 여유를 갖기 위한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끊임없이 사태를 관찰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찾고, 과도한 욕심을 억제하는 태도가 정신적인 여유를 가져온다.

다섯째, 올바른 원칙.

올바른 원칙은 역사의식, 대중의 욕구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 자기 삶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에서 우러나온다. 원칙이 없는 자가 리더가 되면 정말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겨야 할 때 이기지 못하면 꿈을 이룰 수 없다

파워게임이란 것은 분명 승리가 중요한 게임이다. 하지만 승패와 무관할 것 같은 요소들, 다시 말해 원칙과 겸손함 등의 요소가 궁극적으로는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또한 파워게임이다. 앨 고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그리고 카터 대통령이나 우드로 윌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이겨야 할 때 이기지 못하면 꿈을 이룰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패배로 인해 역사는 엄청난 굴곡을 겪고 대중들은 고통을 받게 된다. 내(저자)가 비록 돈을 받고 전략을 파는 ‘모사꾼’에 불과하지만, 높은 꿈과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저자)의 조언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랄 뿐이다.


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누구에게도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는 것,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지내니?’ 하는 일상적인 인사도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어서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 말이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는 문화 말이다. 완전히 고립된 공간에서 식량을 비롯한 자원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길고도 어두운 겨울을 지나면서, 불필요하게 서로를 죽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던 옛 바이킹 생존 전략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p.23~24)

우리 정원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곳에서 맡은 향기나 본 모습이 아니라 거기서 들은 소리였다. 환청이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는 정말로 식물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p.27)

엄마와 나는 아마 각자의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아마 한 번도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와 딸로 산다는 것은 뭔지 모를 원인으로 늘 실패로 끝나고 마는 실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p.31)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하는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p.33)

재앙을 거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누군가가 이미 그 길을 걸어 다시 그 경험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몸과 마음을 쏟아부으며 과학을 하는지 말할 수 있는 저널은 아직 어디에도 없다. (p.37)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p.49)

씨앗 안의 배아는 자라기 시작하면 일단 허리를 굽히고 기다리던 자세를 곧게 펴서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행태를 정식으로 띠기 시작한다. … 실험실에서는 이 딱딱한 껍질을 긁어내고 물을 조금만 부어도 거의 대부분의 씨앗이 자라난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껍질을 깬 씨앗만 수천 개가 넘지만 그다음 날 거기서 나온 초록을 보면 언제나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토록 어려운 일이 약간의 도움으로 그토록 쉬워진 것이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몸을 펼치고 원래 되려고 의도했던 그 존재가 마침내 될 수 있는 것이다. (p.51)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들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p.52)

정신과 병동의 고통은 너무도 진해서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여름날의 습기 찬 공기에서 숨 쉴 때처럼 그 고통을 들이마시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어려운 일은 환자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점점 커져가는 나의 무관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77)

그래서 나는 병원 일을 그만두고,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일도 포기했다. 그 대신 나는 내 삶을 구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 (p.79)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한곳에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을 포기해야 한다. … 그 작은 뿌리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장소에 몇 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를 점칠 기회를 딱 한 번 가진다. 뿌리는 그 순간의 빛과 습도를 감지하고 자기 속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정보를 점검한 다음 글자 그대로 몸을 던져 뛰어든다. (p.81)

종피(씨의 껍질)에서 첫 배축(식물의 배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부분) 세포가 자라나는 순간 모든 것을 건 도박이 시작된다.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가 먼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엽록소에서 양분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며칠, 때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씨 안에 들어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고, 거기서 실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 (p.81)

그러나 도박이 성공하면 수확도 엄청나게 크다. 뿌리가 필요한 것을 찾게 되면 부피가 커져서 주근이라고 부르는 곧은 뿌리로 자란다. 커지면서 기반암을 쪼개는 힘까지도 발휘하는 주근은 식물 전체의 닻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내내 하루에 몇 갤런의 물을 빨아들인다. … 땅 위의 모든 것, 정말이지 모든 것을 제거해도 멀쩡한 뿌리 하나만 있으면 대부분의 식물들은 비웃듯 다시 자라난다. 그리고 그런 회생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된다. (p.81~82)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을 읽다 앞으로의 독서에 참고할 만한 방법이 소개되어 있어 옮겨보았습니다(p.38~42). 오에 겐자부로는 “재독(再讀, rereading), 즉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전신운동이 된다”, 라고 하네요. (전신운동?)

오에 겐자부로 (大江 健三郎)

  • 책 한 권을 처음 읽을 때, 우리는 언어의 라비린스(labyrinth), 즉 미로를 헤매듯 독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한 번 더 읽을 때는 방향성을 지닌 탐구(quest)가 됩니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서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행위로 전환되지요. 그것이 rereading, 한 번 더 읽는 까닭입니다.
  • 저는 이렇게 합니다. 한 권의 번역본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서 정말로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 혹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에 각각 빨강과 파랑, 두 종류의 색연필로 선을 긋거나, 약간 긴 구절이라면 선으로 상자를 만드는 것이 제 방법입니다. 선을 그을 연필의 색이 적어도 두 종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 색은 감탄한 부분, 매우 흥미로운 부분에 선을 긋는 긍정적인 행위를 위함입니다. 아울러 외우고 싶은 단어나 문장이 있다면, 특별히 선을 굵게 그어두는 게 좋습니다.
  • 또 하나는,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싶은, 다소 부정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 그러니 어느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싶으면 그걸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습니다. 그걸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말하자면 진정으로 책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를 가늠하는 중대한 차이가 됩니다.
  • 진정 훌륭한 언어, 훌륭한 표현이다 싶어 기억해두고자 하는 부분은 붉은색으로 칸을 쳐둡니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 영어 책이라면 '아마존' 같은 데서 금세 구할 수 있을 테니 원서를 사서 우선 감동한 부분을 원문과 대조합니다. 작가가 이걸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것을 쉬이 알 수 있어요.
  • 일 년에 한 권이라도 좋아요. 이런 방법으로 그리 많은 책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번역된 문장을 외우려 들면 좀처럼 외워지지 않는데(예외도 있습니다만), 원문을 옮겨 적으며 외우면 글쓴이 마음의 변화나 리듬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에 외국어라도 외우기 쉬울 때가 많습니다.
  • 다음은 파란색으로 칠해 둔, 아무래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부분


  • 현대 대도시의 핵심적인 역설은 장거리 연결 비용은 떨어졌지만 인접성의 가치는 더욱 커졌다는 사실. 도시는 인접성, 혼잡성, 친밀성을 특징으로 한다. 도시는 기업에게 인건비, 토지비를 상쇄하는 생산성의 이점을 만들어준다.
  • 어느 나라든지 도시화와 번영 사이에는 완벽할 정도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1인당 생산성, 주관적인 생활의 만족도 측면에서 그러하다. 도시의 인접성은 아이디어의 전파, 지식의 전파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 도시는 소규모 기업들과 숙련된 시민들이 많을 때 번성한다. 산업의 다양성, 기업가 정신 그리고 교육은 혁신을 만들지만, 헨리 포드의 대형 아이디어로 화려한 성공을 거둔 디트로이트 모델은 도시의 쇠퇴로 이어졌다.
  • 쇠퇴하는 도시의 대표적 특징은 경제 규모에 비해 주택과 인프라가 과도하게 많다는 점. 공공 정책은 가난한 ‘장소’가 아닌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건물 중심으로 도시를 개편하려는 행동은 어리석다. 도시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 도시는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즉 도시는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나은 무엇을 찾기 위해 도시로 몰려온다. 이건 축하받아야 할 사실이다. 도시의 빈곤은 도시의 부가 아니라 시골의 부와 비교받아야. 
  • 도시의 토지 이용 규제는 높은 가격, 과도하게 비좁은 아파트, 혼잡함, 스프롤 현상(sprawl: 도시의 급격한 발전과 땅값 상승으로 인해서 도시 주변이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현상), 슬럼가, 부패 등으로 이어진다.
  •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전통적인 도시에서는 운전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탄소배출량이 더 적다. 도시는 탄소배출을 줄인다.
  • 아이디어들은 혼잡한 도시 공간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파되며, 이런 교환은 이따금 인간의 창조성에 힘입는 기적들을 창조한다.
  •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 정보 허브인 ‘#실리콘밸리’가 있는 산타클라라 카운티는 미국의 철도왕이자 상원의원을 지낸 르랜드 스탠포드가 자기 소유의 말 농장에 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과수원과 농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도시의 승리 - 6점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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