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은 이렇다: “미국이 global power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3개의 거대 위성 감시 시설에서 수집하는 정보 덕분인데, 그 중 1개가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파인 갭’이다.”

주무대는 이 파인 갭 내의 — 모든 첩보 영화에 등장하는 바로 그 — 상황실 — 인데, 다른 영화들과 달리 ‘외부의 주적’이 불분명하다. 외려 긴장은 이 ‘연합’ 시설을 만든 두 나라,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서 흐른다.

두 나라는 동맹관계이지만, 하필 ‘중국’에 대해서는 상반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패권 경쟁의 상대국이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게는 최대 교역국이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는 오스트레일리아도 미국의 득세가 달갑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관계 상충이 발생한다면? 즉, 수집된 정보가 한 나라에는 이롭고 또 한 나라에는 해롭다면? 해당 정보를 수집한 요원의 소속에 따라 그 정보를 감추고, 속이고… 처리 절차를 달리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살을 맞대고 있는 파트너 관계라도 불신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런 힘싸움 기싸움 사랑싸움(?) 위에 파인 갭 내부의 첩자를 색출하는 임무가 진행되고, 그 첩자의 정체에 관해 이 떡밥 저 떡밥이 투척된다. 파인 갭 인근 지역에서 광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중국 기업과 그 기업의 주재원이 매우 존재감 있게 그려지다가 별안간 시즌 1이 종료된다.

파인 갭은 실제 존재하는 시설이고,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두 나라가 연합운영하는 시설이니, ‘이럴 수도 있겠다’의 가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역시 미국과 연합군을 구성하고 있는 나라의 구성원이라 그런지 이 이야기가 그다지 설득력 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개봉관에서 영화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스크린 아래에 횡 스크롤 바가 없어서 기분이 묘했다. 토요일 오전 영화관은 한산했고, 영화에 집중하기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여건이었다.

호평이 많았기에 보기 전부터 기대를 했고, 역시 만족스러웠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게 다 들어 있는 영화였다. 피아노, 여행, 우정, 화해, 가족애, 편지 그리고 아라곤(아라고른 2세).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이른바 ‘소수자 영화’로 분류되는 모양인데, 이 영화는 작품성은 물론이고 대중성도 놓치지 않았다. ‘덤 앤 더머’ 시리즈를 만들었던 피터 패럴리 감독이 ‘버디 무비란 이런 것이다’하고 제대로 보여준다.

‘그린 북’(Green Book)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미국에서 흑인들이 여행을 할 때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식당 등을 정리해놓은 일종의 여행 가이드북이라고 한다. 1962년, 뉴욕 뒷골목 출신으로 나이트클럽 기도 ‘떠버리 토니’(비고 모텐슨)이 흑인 클래식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남부 투어의 운전사(겸 로드매니저)로 고용되면서 그와 함께 남부 지방을 여행하게 된다.

지금도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1960년대 초반의 미국의 인종차별은 정말로 심했다. 어떤 주에서는 인종차별이 법으로 정당화 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도 노골적인 차별 장면이 등장한다. 어떤 거리에는 밤 늦게 흑인이 나다닐 수 없다는 ‘흑인통금법’이 있다거나 기껏 피아노 연주를 하라고 초청해놓고 화장실 만큼은 따로 쓰도록 한다거나.

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치미는 장면들이 많고, 그 감정을 대변하듯 뉴욕 뒷골목 출신 우리의 ‘떠버리 토니’는 즉각적으로 대응한다. 본인 스스로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었지만, ‘돈 셜리’가 당하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 욕도 하고 화도 내고 심지어 경찰을 줘패기도 하고 한다. 

반면, 고상한 ‘돈 셜리’는 이 상황과 맥락 — 남부 백인들이 클래식 피아노 같은 고급 문화를 즐긴다는 생색은 내고 싶으면서, 여전히 자신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하등 인종으로 차별하는 이중성 — 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끝까지 ‘존엄함’을 지키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런 태도,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토니’에게 ‘돈 셜리’는 이렇게 답한다:

폭력을 사용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소.
당신이 존엄함을 지킬 수 있을 때만이 이길 수 있을 것이오.
명심하시오. 존엄함이 언제나 이긴다오. 

(You never win with violence.
You only win when you maintain your dignity.
Dignity Always Prevails.)

같은 시기,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비폭력 저항의 메시지가 영화에도 녹아있는 듯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돈 셜리’는 북부에서는 환영을 받으며, 신변 위협 없이 편하게 투어를 다닐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위험한 남부 투어를 본인이 자처한 것이었다. 변화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를 낸 것이다.

그렇게 용기 있고 의식 있는 고귀한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고뇌와 희생. 이렇게만 끝났다면 영화가 얼마나 지루하고 촌스러웠겠는가. ‘돈 셜리’가 처한 상황은 한층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다. 궁극적으로는 대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근접한다. ‘토니’가 당대 유명한 ‘흑인 대중 가수’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항상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려는 ‘돈 셜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흑인은 당신이지만, 오히려 내가 더 흑인다운 것 같소다.”

이 말은 ‘돈 셜리’를 자극한다. 사실 ‘돈 셜리’는 흑인이지만 노예가 아니고, 흑인이지만 부유하며, 흑인이지만 박사 학위가 있다. 흑인이지만 재즈가 아닌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하고, 흑인이지만 말이 많지 않고 흑인이지만 상류층의 언어를 쓴다. 흑인이란 무릇 이렇다(또는 이럴 것이다)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 흑인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의 모습과 내가 바라는 모습이 다르듯, 내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과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역시 다르다. 이 둘이 일치하는 경우는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 말그대로 ‘고정관념’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끊임없이 정체성 투쟁을 한다. 내가 가진 모습과 나를 바라는 모습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하고, 내가 가진 정체성을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자 한다.

그 고독한 투쟁이 연주를 마치고 백인들로 가득찬 청중을 향해 꾸며진 웃음을 어색하게 지어보이는 ‘돈 셜리’의 얼굴에서 표현된다. 매일 밤, 홀로 위스키 한 병을 비우며 어떤 커뮤니티에서도 진정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상심의 얼굴에서 표현된다. 그가 후일 친구가 된 ‘토니’와 함께 지내면서, 그와 함께 흑인들만 갈 수 있다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보이는 환한 웃음과 대조된다. 

‘떠버리 토니’는  돈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지만, ‘돈 셜리’와 함께 한 여정 속에서 그를 진심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자칫 계몽적인 접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는 일이 있기도 한다. ‘토니’와 ‘돈 셜리’의 관계가 보여주듯 상대방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와 같은 경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196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가 곳곳에 보였다. JFK가 언급되고, 뉴욕에 있는 영화관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를 상영하고 있다는 광고판도 보인다. 반면, 켄터키주에 도착해서 여기 왔으면 이걸 꼭 먹어야지 하면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장면은 고증 오류라고 한다. 실제로 KFC는 1972년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

“모든 애견인들의 염원(念願)을 담은 판타지” — 어느 평론가의 평이다. 잠깐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이 영화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나은 표현을 찾기는 어려웠다.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던져진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이 개는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는데, 곧장 다른 개로 환생한다. 이 과정을 겪어도 ‘정체성’은 또렷이 유지된다는 설정이다. 왜? 어떻게? 그냥 ‘설정’이다. (그래서 ‘판타지’라는 얘기다.)


한 번은 레트리버로 태어났다. 차 안에 갇혀 탈수로 죽을 뻔했다. 이를 우연히 발견한 “이든”이라는 소년 덕분에 살아난다. 그리고 길러진다. 그로부터 “베일리”라는 이름을 얻고, “이든”의 곁에서 그의 모든 성장 과정을 함께 한다.


개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에 비하면 짧다. “베일리”는 “이든”의 냄새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한다. 보통의 동물을 주제로 한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대표적인 예로 ⟨말리와 나⟩ (Marley & Me, 2008).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개가 환생(!)을 한다.


“베일리”는 셰퍼드로 다시 태어나 “엘리”라는 이름을 받는다. 외로움을 품은 경찰 “카를로스”와 함께 살며 그를 위로하고 그와 함께 범죄를 해결한다. 그다음에는 웰시 코기로 태어나 “티노”라는 이름을 받는다. 역시 외로운 대학생 “마야”의 곁에서 살면서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모습까지 지켜본다.


‘개’의 눈으로 보기에 ‘인간’의 삶은 가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인간이 쓴 대사이지만, 이 말은 특히 가슴에 남았다: “인간들은 복잡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예를 들면, 이별 같은 것.” (Humans are complicated. They do things dogs can't understand. Like leave.)


환생을 거듭하던 “베일리”는 결국 삶의 목적을 찾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Just be here now.)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별’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서 왜 떠나는가. 좋아한다면서 왜 같이 있지 않는가.


영화에서는 장성한 “이든”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가족과 “베일리”를 잠시 떠나게 된다. “베일리”는 엄청나게 먼 거리를 가로 질러 “이든”이 타고 있는 차를 따라 잡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이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명절 연휴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인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 있으면 궁금하고, 보고 싶은 가족들을 뒤로 하고 나는 왜 서울로 가고 있는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서울에 ‘나’의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별’을 통해 홀로 서는 덕이 ‘성장’의 한 방법이고, ‘성숙’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 그러면 된 것이다.


반려견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며 교감하는 장면들이 많다. 개를 데리고 학교도 가고 수업도 듣고 운동 경기도 보고 동네 축제도 가고 한다. 개와 살아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나에게는 꽤 신선한 간접 경험이었다.

기대를 모았던 ⟪SKY 캐슬⟫ 20회는 확실히 충격이었다. 사실 비난이 난무했다. 20회만 작가가 바뀐 것 같다느니, 20회만 교육방송에서 특별제작했다느니. 그 중에서도 SF작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듀나가 쓴 드라마 ⟪SKY 캐슬⟫ 평론이 화제가 되었다.


'SKY 캐슬' 유현미 작가만 알고 우리는 몰랐던 것들

https://entertain.v.daum.net/v/20190202160636308


제목부터 남다르다. 보통 자신을 포함한 시청자는 잘 아는 것을 작가 당신은 왜 모르느냐, 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 공격 방식을 뒤집었다. 작가 당신만 알고 우리는 몰랐다, 라는 식으로 제목을 쓰고 있다.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최고의 결말 보여준 ‘스카이 캐슬’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81283.html


작가이자 사회비평가인 박권일이 쓴 위 칼럼의 제목은 어떤가. 다들 욕을 하는 ⟪SKY 캐슬⟫에 대하여 최고의 결말을 보여줬다고 쓰고 있다. 눈길을 확 잡아끈다. 반어법인가?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에서?


14회 엔딩 너무 세다. 16부작도 아니고 20부작인데, 마무리까지 어떻게 끌어가려고 이 타이밍에 이런 전개를? 다음 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범인 찾기’라는 숙제를 주었다.


이 드라마를 «파우스트»라고 설명하는 글을 보았다. 오늘날 한국의 엄마들이 영혼을 걸고 거래할 것은 ‘자식의 서울대 의대 합격’ 밖에 없다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 김주영 선생이 “그 가족의 불행은 그 부모의 욕심 탓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태란이 연기하는 ‘이수임’ 캐릭터에 공감도 안 되고, 몰입도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럴 것 같다. 현실에서도 보기 어렵다.


다만, 김주영 선생을 ‘감히’ 이해할 수 있다면 이수임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드라마 내에서 김주영 선생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싸움의 핀트가 어긋났다. 결코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학원물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출세욕, 속물적 세계관, 허위 의식을 ‘대학 입시’라는 소재로 풀고 있는 드라마에서 교사 등 학교 관계자가 뚜렷한 역할이 없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드라마에서 ‘학교는 성적만 따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만약 이게 현실의 반영이라면 참 서글프다.


‘학력위조범’ 차세리의 일갈에 마음이 뜨끔했다. “돈만 보내주면 부모 역할 다 한 것인가?”, “학점이 B만 떠도 목소리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공부 못하는 자식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캐슬’, 말 그대로 나와는 거리가 먼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라서 마음 편히 보고 있었는데, ‘방심하지마. 이거 니 이야기야.’ 하는 것 같아서 잠잠하던 속이 뒤틀린다. 시청자의 심연을 헤집는 무서운 이야기다.

레이디 버드 (2017)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시얼샤 로넌Saoirse Ronan)이 직접 지은 자신의 이름이다. 부모 품을 떠나 멋진 동네로 훨훨 날아가고픈 소망을 꾹 눌러담은 작명이랄까.  

초등학교 때였나. 처음으로 이메일 아이디를 만들 때가 떠오른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아닌 나를 지칭할 새 단어를 찾아야 했던 그 짧은 순간의 묘한 설렘이 기억난다. 어떻게든 멋진 이름을 붙여보고 싶어 영어사전을 뒤적였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무거운 질문에 나는 무엇이다, 라고 과감한 답을 내밀 수 있는 무모한 용기.

그래도 그 이메일 아이디를 실제 생활에서까지 “안녕. 나는 ⃝⃝이야.”라고 하면서 말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라고 생각하지 않나, 보통?

내가 바로 ‘레이디 버드’님이시다.

그러나,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는 다르다! 누구와 만나도 당당히 “안녕. 난 레이디 버드야.”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는 악수를 청한다.) 이게 인사다. 학교 선생님들이 자신을 “크리스틴~” 하고 부르면 즉시 “레이디 버드”라 불러달라고 정정할 정도다. 10대 사춘기를 통과하는 소년 소녀라고 해도 이 정도의 자의식은 확실히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레이디 버드’도 여느 10대와 같은 고민을 한다. ‘대학 진학’으로 대변되는 진로 고민, 연애 고민, 우정 고민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와의 관계 고민.

그렇다. 이 영화는 청춘 성장물이다. 지금껏 수많은 소설, 드라마, 만화, 영화에서 반복해서 다루어졌고, 지금도 다루어지고, 앞으로도 다루어질, 바로 그 소재다. 그래서 식상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일단은 코미디다. 나는 어떤 이야기든 어떤 결론이든 코미디를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잔뜩 쪼그라든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200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공감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다.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 주목받는 배우이기도 한 —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이 1983년생이고, 그 시절 유행하던 팝송, 대중문화 등 그 시대의 ‘갬성’이 곳곳에 재현되어 있다.

이 누나가 그레타 거윅. 사진 참 멋있죠잉.

그리고 장소적 배경이 되는 ‘새크라멘토’. 캘리포니아의 주도이지만 LA, SF, SD에 비해 특색 없고 따분한 도시로 그려지는 이 동네의 풍경이 어쩐지 내가 나고 자란 ‘대구’라는 도시와 여러모로 닮은 느낌이랄까. 경관은 다르겠지만, 그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역시 그 도시를 벗어나 서울로 가고 싶어한다는 점이 닮았달까.

그래서 나의 연년생 누이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감상을 묻고 싶었다. 우리도 ‘레이디 버드’처럼 이불킥 투성이 사춘기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이 은근히 신경이 쓰이지 않았느냐고, 나를 꾸미기 위해 이런저런 부끄러운 거짓말들을 하지 않았느냐고, 부모님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던 때가 있지 않았느냐고.

개봉한 해에 봤다면 두말없이 올해의 영화로 꼽았을 듯. 이야기의 힘, 영상, 음향. 허투루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잘 압착된 고농도 고밀도 작품이다. 흡입력과 몰입감이 대단하다. 과장을 좀 보태서 주변 산소 농도가 옅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 포스터만 보고 <나르코스>와 비슷한 영화려나 생각했는데, 완전 딴‘판’이었다. (‘메데인 카르텔’이 언급되므로 배경이 겹치기는 한다.)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의 작전 현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고 그 이후에도 그를 등장시키며 이야기를 끌어가기 때문에 마치 그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건 배후의 더 큰 이야기를 감추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빤한 수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효과적이었다. 결국 그는 더 큰 이야기의 중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에 머무른다. 그와 동일시 되는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몰랐던 참혹한 세계 또는 세계의 이면을 당혹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케이트’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그 장면들을 바라보던 관객의 눈빛이 꼭 그러했을 것이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는 ‘무력감’이다. 내가 주인공인 줄 알고 살았는데 고작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떠한 희망도 보이질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녕 아무 것도 없다는 현실을 직시할 때의 바로 그 느낌. 내가 지켜온 법규와 원칙은 더 큰 ‘판’의 법규와 원칙 밑에서 무력해진다. 지금의 나로선 그게 맞는지 틀린지 판단조차 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나는 총을 겨누고도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당길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당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 결국 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가족, 특히 아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극히 드물다. 딱 세 명의 아이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화면에 등장하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 그들에게 닥칠 것이 불행 밖에 없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한 아이는 아버지를 잃고, 나머지 두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죽는다. 그밖에 가족, 아이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은 작전 투입 여부를 정할 때 뿐이다(“결혼했나? 아이가 있나?”). 이 영화에서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건 이 영화의 배경 때문에 그렇다. 전쟁터 같다고? 글쎄,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꽃핀다고 하지 않던가. 지옥에서는 아닐 것이다.

⟨중쇄를 찍자!⟩ 제3화. (참고: 제1화, 제2화)  

초인기작 ⟪츠노히메사마⟫의 담당편집자가 된 ‘쿠로사와’와 그의 옆자리에서 앉아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편집자 ‘미부 헤이타’(아라카와 요시요시) 둘이서 에피소드를 이끈다. 두 사람의 공통 이슈는 편집자로서 만화가와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해법을 미리 밝히자면 그것은 독자. 처음도, 끝도 독자. (처음도, 끝도 고객!)

‘쿠로사와’는 담당편집자가 되어 연재분 마지막에 들어갈 카피 문구 고민에 직면한다. 이 카피는 편집자가 작가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 이 메세지를 쓰는 것도 편집자의 일. 그는 여기서도 직진한다. 옆자리 선배 편집자인 ‘미부’를 다그치며 그에게서 카피 짜내는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 (어이, 어이, 선생님을 잘못 고른 것 아닙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진다. 자신이 담당하는 ⟪츠노히메사마⟫의 만화가 ‘타카하타 잇슨’이 멘탈 문제로 퀄리티 난조를 보이는 것. 다음주 연재분의 콘티가 주인공 독백이 많고 전개가 지지부진. 한마디로 따분했다. ‘쿠로사와’는 곧장 ‘타카하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지만, ‘타카하타’는 역시 신입 편집자라서 뭘 모른다며. 단지 강약 조절일 뿐이라고. 자신은 이렇게 해서 10년을 연재한 것이라며. 윽박지르기에 가까운 변명을 한다.

‘쿠로사와’ 이전까지 ‘타카하타’를 담당하였던 부편집장 ‘이오키베’(오다기리 죠)는 ‘쿠로사와’에게 묻는다. 이 콘티를 받아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답을 주저하는 ‘쿠로사와’에게 명대사 시전.

“우리 편집자가 누구한테 월급 받는 거 같아? (쿠로사와: 회사?) 독자야.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작품을 가장 높은 퀄리티로 끌어 올린다.
네가 그걸 하지 않으면 무얼 위해 여기 있는 거지?”

결국 ‘쿠로사와’는 이 콘티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고,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는 만화가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세지를 전달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카피 문구’를 통해서. (결국 편집장의 승인에 따라 카피 문구가 수정되는데, 이 수정 작업의 각 단계를 세심하게 보여주는 장면도 눈여겨 볼만하다. 각 단계별 그 업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수정 요청을 접수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다시 디자이너에게 가서 수정 요청의 내용을 전달한다. 단순히 전화 한 통으로만 묘사할 수도 있는 단계를 굳이 이렇게 보여줬다. 이런 ‘과정 보여주기’를 통해 주간 만화 잡지 한 권이 만들어지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단계 속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정된 카피 문구가 출력된 견본을 들고 ‘타카하타’의 집에 도착한 ‘쿠로사와’. 콘티 수정을 대차게 요구하지만, ‘타카하타’는 완강히 거부한다. ‘쿠로사와’는 이런 말을 한다.

“지금의 콘티로는 독자들의 가슴을 떨리게 할 수 없어요!
저도 얼마 전까지 독자였으니까요.
작품을 지키는 게 선생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콘티를 내놓는다면 독자들은 실망할 겁니다.”

(격렬한 대립 끝에 ‘쿠로사와’는 홀로 눈물을 흘리고 만다. ‘쿠로사와’가 던진 회심의 승부수는 과연 먹혀들 것인가?)

이 사람이 ‘미부’.

이 에피소드의 또 하나의 주인공 ‘미부’가 처한 상황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작품이 독자 앙케이트에서 꽤 오랜기간 연속 꼴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편집장은 좀 더 분발하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미부’는 이를 무시한다. 독자에게 아부할 필요 없이, 만화가와 편집자가 2인3각으로 합심하면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지론을 홀로 간직한 채. (문제는 그 만화가와 2인3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겠다.) 상황은 매주 더 심각해지고 결국 연재중단. 이대로는 잡지에 실을 수 없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담당 만화가와의 사이가 뒤틀리게 되는 것도 당연. 만화가는 ‘미부’에게 자신이 계속 만화를 그리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한다.

‘미부’는 신작 아이디어까지 짜내서 프리젠테이션을 해보지만, 만화가는 그냥 꺼지라고 말한다. 낙담한 ‘미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본가에서 짐을 찾아가라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그 짐이란 다름 아닌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것이 없던 어린 시절 ‘미부’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주간 만화 잡지 모음. 그 잡지들을 하나씩 펼쳐보던 ‘미부’는 잡지 중간에 붙어 있는 독자엽서에 눈이 머무른다. 우표값이 아까워 부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의견이 독자엽서에 정성스럽게 쓰여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독자 앙케이트는 어쩌면 독자의 진심이 담긴 메시지라는 것. (이 대목에서 나도 향수에 젖었다. 주간 만화 잡지, 월간 게임 잡지를 많이 샀지만 한 번도 독자엽서를 보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독자엽서의 빈 칸은 열심히 채웠다.)

결국 ‘미부’는 그간 무시했던 독자 앙케이트 결과를 다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신이 담당했던 만화에 대한 독자 의견을 꼼꼼히 정리하여 만화가에게 발표한다. 왜 우리 만화는 인기가 없었는가. 매우 냉정한 분석이었다. 발표 이후 만화가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이 안타까운 결과는 모두 편집자 자신의 탓이라고. 자신은 정말로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이 만화를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편집자인 자신은 만화가의 작품이 어떻게 독자에게 전달될 것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고. (‘미부’의 진심이 담긴 발표는 만화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만화가에게는 독자라는 튜브가 필요하다.
그 튜브를 건네주는 게 나의 일이다.
두 번 다시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만화가를 위해서도.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를 위해서도.”

재능 있는 만화가를 발탁, 연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편집자가 갑의 위치에 있을 것 같지만, 연재를 시작한 이상, 만화가로부터 매주 제때 작품과 콘티를 받지 못한다면 책이 나올 수 없게 되고, 게다가 어떤 작품이 10년 가까이 연재되어 어엿한 간판작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면, 오히려 만화가가 갑 또는 슈퍼갑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이 드라마에서도 편집자들은 만화가를 진심을 다해 예우한다. 매주 끝이 없는 마라톤을 이어가는 만화가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렇지만, 그런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번 에피소드의 교훈이랄까. 

편집자는 작가의 초고를 가장 먼저 받아보는 제1독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한다. 제1독자는 독자가 아니다. 독자와 작가의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즉, 다리이다. 작가는 편집자라는 다리를 통해 독자와 연결된다. 자신의 작품을 좀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책의 서문에 편집자에 대한 감사 인사를 넣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제1독자로서 함께 내용을 발전시켰고,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1독자로서 작가와 독자를 잇는 다리가 되는 것, 가장 중요한 ‘편집자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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